반도체 설계가 AI 시대 산업 경쟁력 좌우
반도체는 크게 소자, 공정, 설계 등 여러 분야로 나뉘며, 설계 영역 안에서도 고속 인터페이스, 메모리, 아날로그 회로, 디지털 회로 등 세부적으로 구분된다. 이 중 ‘반도체 IP 설계’란 반도체 칩을 구성하는 핵심 회로 블록을 만드는 과정이다.
지난 10여 년간 반도체 산업의 핵심은 무선통신이었다. 4G에서 LTE, 5G로 이동하는 동안 스마트폰에 얼마나 최적화된 칩을 탑재하느냐가 경쟁의 기준이었다. 퀄컴의 ‘스냅드래곤’, 삼성의 ‘엑시노스’처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칩이 대표적인 전장이었다. 통신 품질을 높이고, 전력 소비는 줄이고, 처리 속도는 빠르게 만드는 설계 역량이 핵심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최근 AI의 급부상으로 반도체 산업의 무게중심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스마트폰용 AP 칩 중심에서 AI 연산을 담당하는 GPU, 대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데이터센터용 CPU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AI 모델이 커질수록 더 많은 연산이 필요하고, 이를 저전력으로 가능케하는 반도체 회로 설계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임영현 교수는 “과거엔 무선통신 성능을 높이는 칩이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AI 연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처리하느냐가 반도체 설계의 새로운 과제”라고 설명했다.
설계의 중요성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임 교수는 “설계 단계에서 면적과 전력을 10%만 절감해도, 전체 데이터센터가 축구장 크기에 달하는 것을 고려하면 면적과 전력을 어마어마하게 절감할 수 있다. 설계 도면의 차이가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기업과 인력 간의 인력 불균형 해소할 것
반도체 설계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현장에서 요구되는 고급 설계 인재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특히나 실제 산업에서 복잡한 회로 설계를 이끌 수 있는 석·박사급 전문 인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급이 크게 부족하다.
더 큰 문제는 인력의 편중이다. 설계 인재가 대기업으로만 향하고,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은 적합한 인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임 교수는 “스타트업은 사람을 못 구해 힘들고, 학생들은 갈 곳이 없다고 느낀다. 이 미스매치를 해소하는 것이 이번 사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공백을 채우기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할 계획이다. 첫째는 특화 교육을 통한 실전형 인재 양성이다. 단순히 이론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 현장에서 바로 투입 가능한 설계 역량을 키운다. 둘째는 강소기업과의 취업 연계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경기도 내 반도체 기업으로의 취업을 유도해 인력 공급 불균형 해소에 나선다.
임영현 교수는 굴지의 IT 기업인 퀄컴에서 모바일 AP 칩 설계를 담당했다. 최근 경희는 퀄컴, 인텔 등 글로벌 IT 기업 출신의 교원을 다수 임용하며 반도체 설계 역량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사업에 참여하는 대학원생은 아날로그, 전력 관리 회로에 특화된 교육을 듣게 된다. 아날로그는 흔히 오래된 옛날 기술로 여겨지지만, 시각·촉각·음성·통신 주파수 등 실제 세계에서 정보가 되는 모든 신호가 아날로그다. 임 교수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아날로그이고, 이를 반도체가 처리할 수 있는 디지털 신호로 바꾸는 변환 회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변환을 담당하는 회로가 아날로그-디지털 컨버터(ADC)다. ADC의 정밀도와 속도가 센서, 통신, AI 시스템 전체의 성능을 좌우한다.
아날로그 회로의 역할은 신호 변환에 그치지 않는다. 칩 전체가 하나의 박자에 맞춰 동작하도록 정밀한 클락을 생성하는 위상 고정 루프(PLL)와 칩 내부 각 블록에 안정적인 전압을 공급하는 전력관리반도체(PMIC)가 대표적이다. PLL이 만드는 클락과 PMIC가 공급하는 전압의 정밀도는 AI 반도체의 성능을 좌우한다. GPU와 HBM 사이의 데이터 전송량이 급증하는 환경에서는 클락이나 공급전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전송 오류가 발생하고, 이는 곧 전송 속도와 연산 성능 저하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회로 설계가 반도체 생태계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다.
또한 AI 반도체가 고성능화될수록 전력 관리 회로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고성능 연산이 늘어날수록 발열과 전력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전력 관리 회로는 이를 효율적으로 제어해 AI 반도체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뒷받침한다. 이처럼 임영현 교수는 산업 수요는 크지만, 전문가는 부족한 아날로그·전력 관리 회로 설계 분야에 교육의 초점을 맞춰 산업이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낼 계획이다.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주제 고민하고, 완성해 나가는 경험 해보길”
교육 프로그램은 산업 현장과 긴밀히 연계된다. 임영현 교수는 경기도 내 반도체 기업 10여 곳과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단순한 현장 견학에 그치지 않고, 기업이 요구하는 역량을 커리큘럼에 직접 반영했다. 학문에만 얽매이지 않고 기업의 실제 수요를 반영해 과목을 재설계하고, 산학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이 실제 개발 과정에 참여하도록 운영된다.
회로 설계 전문 도구인 케이던스(Cadence)를 활용한 실습 환경도 체계적으로 구축된다. 임영현 교수는 “학부 과정에서는 설계 도구를 충분히 다뤄볼 기회가 많지 않다. 이번 사업을 통해 대학원 단계에서 전문적인 설계 도구를 자유롭게 다루는 역량을 키울 기회”라고 강조했다.
임영현 교수는 이번 사업이 학부생들에게도 의미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연구실에서 아날로그·전력관리 회로 분야를 특화해서 배우고, 논문을 쓰고, 취업까지 연결되는 경로를 만들 수 있다. 대학원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주제를 직접 고민하고, 회로로 구현하고, 측정을 거쳐 논문으로 완성하는 그 과정이 어떤 경험보다도 값지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설계 역량 강화, 글로벌 진출 도전하는 인재 요람 될 것
임영현 교수는 미국의 굴지 IT 기업인 퀄컴에서 모바일 AP 칩 설계 실무를 경험한 뒤 경희에 부임했다. 현재는 기존의 모바일 회로 연구를 넘어 원자력공학과와 협력해 우주 환경에서도 정상 작동하는 내방사선 회로 연구 등 우주반도체 분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반도체 핵심 IP 설계 전문인력 양성 사업에 참여한 대학원생은 산업적 수요는 크지만, 전문가가 부족한 아날로그, 전력 관리 회로에 특화된 교육을 받는다.
또한 임영현 교수는 GPU와 HBM 사이의 고속 데이터 전송 문제도 주목하고 있다. 기존의 유선 연결은 선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발열이 심해지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를 무선 RF 방식으로 대체해 AI 반도체의 성능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번 사업 수주는 전자공학과에 의미 있는 전환점이다. 최근 인텔·퀄컴·IMEC 등 글로벌 IT 기업 출신 교원이 다수 부임하면서 설계 역량이 빠르게 강화됐고, 그 성과가 이번 선정으로 이어졌다. 임 교수는 “이번 선정을 계기로 경희의 반도체 설계 분야의 역량과 위상을 꾸준히 높여나갈 것”이라며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기르고, 나아가 창업이나 글로벌 진출에 도전하는 인재들을 키워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